창조란 만물의 근원인 무의식으로 되돌아가 지난한 노력을 통해서 가늘고 긴 한 가닥의 실을 자아내는 일인데, 창조할 때마다 우리는 물레를 돌리는 여신을 만나 여신이 무의식에 이미 마련해놓은 것들을 의식의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한다.세계의 신화와 민담에는 물레는 돌리는 여신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이들의 이미지는 인간 정신의 궁극적인 원천을 상기시켜 온전성을 획득하려는 근원적인 갈망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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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거듭거듭 만물의 근원인 무한한 무의식으로 되돌아가 물레질을 해서 지금 우리가 지상에서 누리는 엄청난 문명을 꽃피워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레질로 길고 고운 실이 자아지면 고유한 문양을 짜게 되는데 이 과정이 길쌈이다. 심리학적으로 길쌈은 '다른 두 요소의 분화 혹은 구분'을 뜻한다. 씨실과 날실, 수평과 수직, 팽팽함과 유연함, 강함과 부드러움, 긴 것과 짧은 것, 오른쪽과 왼쪽, 위와 아래, 안과 밖, 주는 것과 받는 것, 낡은 것과 새것, 밤과 낮, 물과 불, 땅과 하늘, 자연과 문명 등······.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전환도 바로 이 분화로부터 시작한다. 분석심리학자 아니엘라 야페(Aniela Jaffe)는 하나의 사실을 둘 혹은 그 이상의 측면으로 구분해내거나, 내포된 의미의 대극을 찾는 것이 의식적인 깨달음의 선결과제라 설명한다.
고혜경(2010),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한겨례 출판, p2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