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귀뚜르르 가느단 소리,
달님도 추워서 파랗습니다.
울 밑에 과꽃이 네 밤만 자면,
눈오는 겨울이 찾아온다고,
달밤에 오동잎이 떨어집니다.
(방정환, 귀뚜라미 소리, 1924년)
봄
이성자
풀잎들 사이에서
봄이 흔들리고 있다
풀씨만한 작은 소리로
가만히 불러보면
용케도 알아듣고
쫑긋 귀를 세우는 풀잎들
풀벌레가 길을 내며
기어 가는 소리
발자국에 묻어 오는 연둣빛
바람 소리
풀잎 사이에서 흔들리는 봄.
- 이성자, 너도 알거야 중-
(이 시에서 내 눈과 마음을 붙잡은 싯구는 1행과 2행이다. 마음에 들기도 하면서도 조금 아쉬웠다. 나 같으면 조금 달리 했을 거라 생각했다. 예를 들면
'풀잎들 사이에서/ 겨울이 흔들리고 있다'// 그래도 이 시는 참 좋다)
화분 하나
화단 구석에 버려진
오랫동안
꿈 하나 키우며
살았을 거야
밤마다
작은 별을 바라보며
기다렸을 거야
고운 나무 한 그루
가꿀 꿈을 꾸면서
첫 발자국
남호섭
눈이 내렸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발을
내가 걸아갑니다.
240밀리짜리 발자국을
또렷하게 찍습니다.
아이들이 놀리던
팔자걸음이 그대로 찍힙니다.
누가 봐도 내 발자국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내가 만들어서
이렇게 가고 있습니다.
- 남호섭, 놀아요 선생님 중-
똥
풀 뜯는 소가 똥 눈다.
긴 꼬리 쳐들고
푸짐하게 똥 눈다.
누가 보든 말든
꼿꼿이 서서
먹으면서 똥 눈다.
다모
네 이름 뜻을 누가 묻거든
뜻이 아니라 느낌이라고 말하렴.
다모야!
세상에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느낌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라.
사람을 만나서도 첫 느낌을
늘 기억해라.
간(肝)
윤동주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려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단풍
최진수
붉은 단풍은 붉게
노란 단풍은 노랗게
물드는 게 아니다
이미 잎 속에
붉음과 노랑이 담겨 있다
초록 잎에 감춰져 있을 뿐이다
찬바람이 들어
초록 빛깔이 빠지면
조금씩
붉고 노란 제 빛깔 드러낸다.
저마다 다른 빛깔로
산을 물들이고
산은 울긋불긋
또 우리를 물들인다.
나는 무슨빛깔로
담겨 있을까?
나는 무슨 빛깔로
드러날까?
혼자 우는 아이
손택수
울음을 그칠 수가 없어요
한참을 울다 보면 눈물이
볼을 핥아주거든요
괜찮아, 괜찮아,
아무도 달래주질 않는
볼을 가만가만
쓰다듬어주거든요
아무도 달려오질 않아
속이 상하고
아무도 달래주질 않아
심통이 나지만
혼자 우는 아이를 달래주는 건
눈물 밖에 없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