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이원수
해는 먼 먼 저 세상에 있다.
빛만 오는
헤아릴 수 없이 먼 나라.
지금 내게 와서 닿는
이 따순 입김은
거기서 오는 마음만의 손길.
어루만지고
땔는 태울 듯 홧홧 다는......
멀리 있어 보고픈 아이,
가버려서 슬픈 어머니.
아득한 먼 곳에서
애타게 더듬어 나를 만져 주시는가.
따가운 볕에
얼굴 내맡기고
마음 흐믛다 못해
눈이 젖어 온다.
-1965년-
봄
이성자
풀잎들 사이에서
봄이 흔들리고 있다
풀씨만한 작은 소리로
가만히 불러보면
용케도 알아듣고
쫑긋 귀를 세우는 풀잎들
풀벌레가 길을 내며
기어 가는 소리
발자국에 묻어 오는 연둣빛
바람 소리
풀잎 사이에서 흔들리는 봄.
- 이성자, 너도 알거야 중-
(이 시에서 내 눈과 마음을 붙잡은 싯구는 1행과 2행이다. 마음에 들기도 하면서도 조금 아쉬웠다. 나 같으면 조금 달리 했을 거라 생각했다. 예를 들면
'풀잎들 사이에서/ 겨울이 흔들리고 있다'// 그래도 이 시는 참 좋다)
화분 하나
화단 구석에 버려진
오랫동안
꿈 하나 키우며
살았을 거야
밤마다
작은 별을 바라보며
기다렸을 거야
고운 나무 한 그루
가꿀 꿈을 꾸면서
첫 발자국
남호섭
눈이 내렸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발을
내가 걸아갑니다.
240밀리짜리 발자국을
또렷하게 찍습니다.
아이들이 놀리던
팔자걸음이 그대로 찍힙니다.
누가 봐도 내 발자국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내가 만들어서
이렇게 가고 있습니다.
- 남호섭, 놀아요 선생님 중-
똥
풀 뜯는 소가 똥 눈다.
긴 꼬리 쳐들고
푸짐하게 똥 눈다.
누가 보든 말든
꼿꼿이 서서
먹으면서 똥 눈다.
다모
네 이름 뜻을 누가 묻거든
뜻이 아니라 느낌이라고 말하렴.
다모야!
세상에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느낌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라.
사람을 만나서도 첫 느낌을
늘 기억해라.
우리가 어른 되면
권태응
우리가 어서 자라
어른 되면은
지금 어른 부끄럽게
만들 터예요.
같은 형제 동포끼리
총칼질커녕
서로 모두 정다웁게
살아갈래요.
지금 어른 부러웁게
해놀 터예요.
38선 없애 치고
삼천만 겨레
세계 각국 겨누며
뻗어 갈래요.
(1949)
북쪽 동무들
북쪽 동무들아
어찌 지내니 ?
겨울도 한 발 먼저
찾아왔겠지.
먹고 입는 걱정들은
하지 않니 ?
즐겁게 공부하고
잘들 노니 ?
너희들도 우리가
궁금할 테지.
삼팔선 그놈 땜에
갑갑하구나.
(1948)
휘파람
늘 듣는 저 곡조
휘파람이 신나요.
공장에 간 언니가
불며 불며 오누나.
신나는 저 곡조
나도 따라 휘파람.
행길까지 마아중
불며 불며 나가요.
가을 새벽
고요한 새벽 하늘
울리는 소리……
어서 밤이 새라고, 닭들 꼬끼오.
먼 길 손님 타라고,기차 삐익삑.
부지런한 타작꾼 기계 타알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