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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옛이야기/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이경덕 원더박스) |
2019. 5. 19.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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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의지를 발현시킨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지만 과분한 욕망은 의지가 아닌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그 탐욕은 참혹한 대가를 요구한다.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 이경덕, 원더박스,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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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함
옛이야기/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이경덕 원더박스) |
2019. 5. 1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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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함은 어리석음과 사악함을 통해 숙성되고 발효된다. ~현명함은 어리석음과 탐욕의 과정을 거쳐야 얻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잘 될 수 없다.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데 그것을 두려워하면 달콤한 열매를 얻을 수 없다.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 이경덕, 원더박스, p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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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스터
옛이야기/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이경덕 원더박스) |
2019. 5. 1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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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는 결정적인 장면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태도와 행동을 보이며 사건을 엉뚱한 곳으로 이끌지만 그 태도와 행동은 매번 본질을 꿰뚫어 이야기의 과녁을 명중시킨다. 로키가 예리하고 날카로운 활이 된 것~
신화에는 트릭스터(trickster)라는 존재가 있다. 트릭스터는 그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사기꾼이나 협잡꾼을 의미하지만 신화에서는 기존의 도덕이나 관습 등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물이나 동물을 가리킨다.~
달리 말하면 선악의 관념이 없지만 창조의 힘까지 갖출 정도로 능력이 출중하기에 당혹스러움과 함께 매혹적인 성격을 가진 존재이다. 이들은 옹뚱한 발상을 통해 세상을 바꾸기도 하고 없던 것을 만들어 내가도 하면서 아야기를 이끌어 간다. ~트릭스터는 이렇게 장난스럽게 엉뚱한 짓을 저지른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트릭스터에게 평온한 일상은 견딜 수 없는 따분함을 의미한다. ~굳이 말하자면 로키가 얻은 것은 장난이 주는 짜릿한 즐거움이다. 아니 그것이 트릭스터의 진정한 목적이다.~ 언젠가 일어날 일에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
서로 대립하게 되면 갈등이나 다툼이 생기기 쉽다. 둘을 중재하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것이 트릭스터~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 이경덕, 원더박스, p27-28, 32-33, 38,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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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쌈,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전환
옛이야기/태초에 할망이 있었다(고혜경 한겨레 출판) |
2017. 3. 1.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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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란 만물의 근원인 무의식으로 되돌아가 지난한 노력을 통해서 가늘고 긴 한 가닥의 실을 자아내는 일인데, 창조할 때마다 우리는 물레를 돌리는 여신을 만나 여신이 무의식에 이미 마련해놓은 것들을 의식의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한다.세계의 신화와 민담에는 물레는 돌리는 여신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이들의 이미지는 인간 정신의 궁극적인 원천을 상기시켜 온전성을 획득하려는 근원적인 갈망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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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거듭거듭 만물의 근원인 무한한 무의식으로 되돌아가 물레질을 해서 지금 우리가 지상에서 누리는 엄청난 문명을 꽃피워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레질로 길고 고운 실이 자아지면 고유한 문양을 짜게 되는데 이 과정이 길쌈이다. 심리학적으로 길쌈은 '다른 두 요소의 분화 혹은 구분'을 뜻한다. 씨실과 날실, 수평과 수직, 팽팽함과 유연함, 강함과 부드러움, 긴 것과 짧은 것, 오른쪽과 왼쪽, 위와 아래, 안과 밖, 주는 것과 받는 것, 낡은 것과 새것, 밤과 낮, 물과 불, 땅과 하늘, 자연과 문명 등······.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전환도 바로 이 분화로부터 시작한다. 분석심리학자 아니엘라 야페(Aniela Jaffe)는 하나의 사실을 둘 혹은 그 이상의 측면으로 구분해내거나, 내포된 의미의 대극을 찾는 것이 의식적인 깨달음의 선결과제라 설명한다.
고혜경(2010),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한겨례 출판, p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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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
옛이야기/옛이야기 이론 및 자료 |
2017. 1. 1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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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무의식의 구조(Die Struktur des Unbewnßten)>에서 융은 억압된 정신의 내용이 '무의식'이라는 것과 '무의식'이 유아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설명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다시 한번 재고하였다. 융에 따르면 '무의식'은 억압된 요소뿐 아니라 의식의 역치하에 있는 정신의 요소, 즉 의식의 역치에 도달하지 못한 부분도 포함되어야 하며, 특히 전혀 의식에 이르지 못한 '무의식'의 부분은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나중에 의식의 내용이 될 씨앗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융은 이미 한번 의식되었다고 할 수 있는, 한 개인의 과거사에서 비롯된 '무의식'의 내용을 '개인무의식(das Persönliche Unbewußte)'이라고 불렀다. 계속해서 개인의 의식의 삶에서 유래하지 않은 '무의식'을 고려할 수 있으며, 이 영역에서 알려지는 것은 개인성에 기초하기보다는 인류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심상으로 "원상(源像,Urbilder)"이라고 불렀다. 이 "원상"은 각 개인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거나 기억에서 더듬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재활성화하듯이 상을 생산하는 것으로, 융은 이것이 개인성을 넘어선 인류 보편적 혹은 집단적 특징(Kollektivcharakter)을 가진다고 하였다.
1916년 이후 융은 '집단무의식'을 밝혀낼 본격적 탐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개인의 과거사를 소급되지 않는 보편적 특징의 정신을 아직 '집단무의식'이라 부르지 않고 "집단적 심혼(Kollektivpsyche)"이라고 불렀다. 이 "집단적 심혼"은 객관적 정신의 특질이 뚜렷해, '개인무의식'과 구분되는 독특한 정신의 현상으로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집단적 심혼"은 대부분 정신의 기본 구성요소로서, 보통 때는 거의 알려지지 않지만, 만약 자발적으로 활동이 있게 될 경우 한 개인의 인격을 확장(Inflation)시키거나, 심하게는 인격의 분열을 일으키게 하는 정도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만약 개인이 이러한 "집단적 심혼"과 동일시한다면 개인 인격의 발전에 큰 장애나 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융은 "집단적 심혼"은 주로 "기본적 충동(Grundtriebe)과 인간의 사유와 감정의 기본형식(Grundformen)"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밝히게 되었다. 따라서 진정한 개인의 인격적발달은 끊임없이 사고나 감정 및 행동의 기초가 되는 이이 "집단적 심혼"으로부터 분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제공하였다.
이유경(2008), 원형과 신화, p.6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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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2
옛이야기/옛이야기 이론 및 자료 |
2017. 1. 13.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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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에서 집단 무의식의 기억을 인식하였다. 그런 집단무의식은 과거의 의미 생산에 수용되지도, 쪼 전적으로 억압 및 추방되지도 않는 것이다. 이것은 외형적으로 전승되지 않은 것이나 부수적으로 전승되는 것으로서 "사회적으로 의식된 것과 상실된 것 사이의 중간 영역에 자리한 "것이다.
알라이다 아스만(2011), 변학수, 채연숙 역,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그린비,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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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옛이야기/옛이야기 이론 및 자료 |
2017. 1. 13.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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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역사를 양극으로 보느냐 동일시하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은 활성적 기억과 비활성적 기억의 관계를 회상기억의 두 가지 상보적 양태로 파악하는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활성적 기억을 기능기억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이 기능기억의 중요한 특징은 집단 관련성, 선택, 관련 가치, 목적의식 등이다. 역사 학문들은 그것에 비하면 이차적 질서의 기억, 즉 현재와의 활성적 관계를 상실한 것을 기록한 기억들의 기억이다. 망각의 지속적인 수거만큼이나 흔한 것도 없다. 이는 가치있는 지식이나 활성적인 경험이 훼손되고 상실되는 것을 말한다. 역사학문들의 광활한 지붕아래 그런 비활성적인 유물들과 주인없게 되어버린 유품들은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시 기능기억과 새롭게 연결될 가능성을 제공한다.
알라이다 아스만(2011), 변학수, 채연숙 역,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그린비, p.180~181
기능기억은 선택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항상 저장된 기억 내용의 토막만을 활성화한다.
알라이다 아스만(2011), 변학수, 채연숙 역,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그린비, p.182
기억에서 의미가 담긴 요소들과 의미 중립적 요소들 사이의 차이를 알박스도 찾아냈다. 그에 따르면 회상이 집단적 기억으로 수용될 수 있는 전제 조건은 의미로의 전환이다. 예컨대 "모든 인격과 역사적 사실은 이미 그러한 기억으로 들어감으로써 학설이 되고, 개념이 되며, 상징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의미를 갖게 되고 사회의 이념체계의 요소가 된다." 특정한 의미 구조의 자장 안으로 들어가는 회상들은 과거의 감각자료, 경험과 구분된다. 기억은 의미를 발생시키고 의미는 기억을 고정한다. 의미는 항상 구성의 문제이자 나중에 부과된 해석물이다. 그에 비해 저장기억은 '무정형의 덩어리'로 사용되지 않고 정돈되지 않은 기억의 마당이다. 이 기억이 기능기억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므로 스토리나 의미 구성에 잘 맞지 않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단순히 잊혀지지는 않는다. 그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의식되지 않는, 부분적으로는 무의식적인 이 기억은 기능기억에 대한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기능기억의 배경을 만든다. 전경과 배경의 모델은 상호 대립의 문제를 다룬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이원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관점으로 파악할 일이다. ~활성화된 요소와 그렇지 않은 요소들 사이에서 내적으로 교류하는 기억의 심층구조는 의식 구조 내에서의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는 조건이다. 이때 이 의식은 그러한 무형적 저장물의 배경없이는 고사하고 만다.
알라이다 아스만(2011), 변학수, 채연숙 역,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그린비, p.183
개인적인 기억들이 실매듭, 그림, 리듬, 춤, 음악과 같은 육체적. 물질적 지주들로 강화되어 문화적 기억의 바탕을 형성하는 반면, 구비적 기억 문화에서는 기능기억과 저장기억을 구분할 수 없다. 기억의 공간은 매우 제한적이고 기억의 기술은 너무 힘이 들어서 집단 정체성을 위해 필요하지 않는 것, 그래서 존재에 필수 불가결하지 않은 것은 보존 문제로 고민할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알라이다 아스만(2011), 변학수, 채연숙 역,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그린비, p.184
집단적 영역에서 저장기억은 불필요하고 시대착오적이며 낯설어진 것, 중립적이고 추상적으로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실 지식뿐만 아니라 선택되지 않은 가능성, 쓰여지지 않은 기회의 다양한 목록들을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 기능기억은 선택, 연관성, 의미구성(또는 알박스의 말로는 틀의 형성)에서 생성되는 적용된 기억을 말한다. 구조없고 관련성 없는 요소들은 합성, 구성, 결합되어 기능기억으로 들어간다. 이런 구성적 행위에서 의미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저장기억에는 근본적으로 소멸된 측면이다. 문화적 기능기억은 주체와 연결되는데, 그 주체는 문화적 기억의 보유자이거나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주체를 말한다. 국가가 민족과 같은 집단적 행동 주체들은 기능 기억 위에 지은 집이다. 그리고 이 기능기억 속에서 특정한 과거를 만들어낸다. 반대로 저장기억은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의 적지 않은 본질적 기능은 기능기억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많이, 그리고 기능기억과는 다르게 보관하는데 있다. 꾸준히 증가하는 대규모 자료 기록, 정보, 기록물, 기억이 들어 있는 무제한의 기록물보관소에는 이런 것들을 구성할 수 있는 주체가 없다. 기껏해야 우리는 여기서 전적으로 추상적인 '인류의 기억'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알라이다 아스만(2011), 변학수, 채연숙 역,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그린비,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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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성
옛이야기/옛이야기 이론 및 자료 |
2017. 1. 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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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시에르의 환상의 시학은 이러한 주제들 이면의 구조에 직접적인 관심을 보인다. 불가능성의 제시는 그 자체로 급진적인 행위이다. 텍스트는 독자가 이탈된 서사형식에 의해 방해받는 경우에만 전복한다.
베시에르가 이해하고 있듯이 환상적인 것은 폐쇄적일 수 없다. 환상성은 닫힌 체계 내부에 있으면서, 통일체라고 간주되어 왔던 공간에 침임하여 그 공간을 개방한다. 환상적인 것의 불가능성은 가능한 것 또는 알려진 것 뒤에 잠재하고 있는 '다른' 의미들 또는 리얼리티를 제안한다.
로지잭슨(2001), 환상성 전복의 문학, 문학동네, p36
불가능한 것은 다의미polysemic의 영역이자 또 다른 의미, 즉 말해질 수 없는 의미를 기입하는 영역이다. 이 의미는 양가성 ambivalence에 기반한 놀이로부터 나온 상대화 과정에 의해 산출된다. 환상은 반대되는 것들 위에 구조화된 서사이기에 한계들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특별히 '실재적'인 것의 가장자리를 가리키는 것 속에서 드러난다.(베시에르, 62쪽)
환상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함을 제시하면서, 존재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문화의 제한을 드러낸다. 요건대 환상은 문화의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틀의 환계를 추적하는 것이다.
로지잭슨(2001), 환상성 전복의 문학, 문학동네, p37
'존재'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한정과 존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미지들은 커다란 역사적 변화를 겪는다. 세속화되지 않은 사회는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것에 관하여 세속적 문화와는 다른 믿음을 지니고 있다. 타자성의 제시는 서로 다르게 상상되고 해석된다.~
로지잭슨(2001), 환상성 전복의 문학, 문학동네, p37
타자성~ 그것은 단지 인간의 공포와 주관적 지각을 통해 세계를 변형하려는 욕망의 투사로 읽힌다. 어떠한 질서가 '경이'라고 부르는 허구를 생산한다면, 또다른 질서는 '기괴uncanny' 또는 '기이함strange'을 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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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소설 이후로 경이로운 것에서부터 기괴한 것에 이르는 점진적인 전이 과정이 나타난다. 고딕적 공포의 역사는 공포가 점진적으로 내면화되고 공포를 자아에 의해 산출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로지잭슨(2001), 환상성 전복의 문학, 문학동네, p38
환상적인 것은 그 존재에 대해 명명할 수 도 없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도 없는 영역으로 개방된다. 그것은 해석을 넘어서는 사건들을 제시한다. 베시에르가 토도로프의 도식을 확장시키면서 기술했듯이, "환상적 서사는 이성의 한계들에 대한 상상적 경험을 전사(轉寫)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환상적 서사는 그 전제가 지닌 지적인 오류들을 비자연적인 또는 초자연적인 것의 가설과 관련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적으로 어떤 지점, 즉 비자연적이거나 초자연적인 가설이 지탱할 수 없게 되어 환상이 "자연적인 경제에서도 초자연적인 경제에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을 끌어들이게 되는 지점으로 접근해간다.
로지잭슨(2001), 환상성 전복의 문학, 문학동네, p39
토도로프는 솔로비요프의 정의가 환상성에 접근하는 데 보다 엄격하고도 광범위한 방법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보았다. '기이한'사건들을 끌어들이는 이야기는 그 기이함에 대한 내적인 설명을 허용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유사한 방식으로 독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토도로프에 따르면 순수하게 환상적인 텍스트는 주인공과 독자가 어쩔 수 없이 머뭇거리도록 만든다. 그들은 묘사되는 낯선 사건들을 받아들일 수도 없지만, 그것들을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간주하고 배제해버릴 수도 없다.
로지잭슨(2001), 환상성 전복의 문학, 문학동네, p42
토도로프는 이러한 머뭇거림의 체계적인 삽입 또는 기입이야말로 환상성을 규정짓는 핵심요소라고 주장한다.
환상성은 세 가지 조건들이 충족될 것을 요구한다. 첫째, 텍스트는 독자가 인물들의 세계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로 여기도록 하고, 기술된 사건들에 대해 자연적인 설명과 초자연적인 설명 사이에서 머뭇거리도록 해야 한다. 둘째, 이러한 머뭇거림은 또한 인물에 의해 경험될 수 있다. 그래서 독자의 역할은 한 인물에게 위탁된다. (......)머뭇거림은 재현되고, 그것은 작품의 주제들 중 하나가 된다. 셋째, 독자는 그 텍스트에 관하여 어떤 특정한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그는 '시적인' 해석뿐만 아니라 알레고리적인 해석도 거부하게 될 것이다.
로지잭슨(2001), 환상성 전복의 문학, 문학동네, p43
환상적인 서사는 그것이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단언하면서도 -이를 위해 사실주의적 소설의 모든 관습에 의존한다-, 명백하게 비사실적인 것을 도입함으로써 사실주의의 전제들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독자를 잘 알려진 일상 세계의 친숙성과 안정성으로부터 끌어내어, 보다 낯선 어떤 것, 일반적으로 경이로운 것과 관련된 영역에 더 가까운 비개연성의 세계로 이동시킨다. 서술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서 주인고보다 더 명료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
로지잭슨(2001), 환상성 전복의 문학, 문학동네, p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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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미스즈 시집)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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